환한 낮에는 볼 수 없고,
캄캄해져야 비로소 잘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캄캄해질수록 어두워질수록 자신의 존재를
더욱 확연히 드러내는 것, 그것은 별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 먼 길을 나선 이들이 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이스라엘의 동쪽에 위치한
페르시아의 사제로 추정됩니다.
‘박사’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마고스’는
페르시아어 ‘마구쉬’에서 파생한 말입니다.
이들은 별의 움직임을 보고 시대의 흐름을 읽던
예언가이자 점성술가였습니다.
기원전 8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바빌론의 설형문자 토판에 ‘기원전 7년에
목성과 토성이 물고기자리에서 만날 거’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17세기 독일의 천문학자 케플러가
행성 궤도 계산을 통해 이를 밝혀냅니다.
기원전 6~7년경 밤하늘 물고기자리 부근에서
목성과 토성이 공전하는 궤도가 가까워져
지구에서 볼 때 하나의 큰 별처럼 밝게 빛났다는 겁니다.
이러한 목성과 토성의 대 근접 현상(Great Conjunction)은
이 시기 총 세 번에 걸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고대 점성술에서 목성은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을,
토성은 유다인들이 살고 있는 팔레스티나를,
물고기자리는 세상 종말을 상징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연구하던 동방의 박사들은
곧 오래전부터 기다려 온 세상 종말의 통치자가
유다 땅에 오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먼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기나긴 여정 동안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어려움 등을 겪으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과연 저 별이 우리를 유다인들의 임금에게 안내해 줄까?
힘든데 그만 포기하고 돌아갈까?’
처음의 그 확신은 유혹과 시련 등으로
희미해지기도 했겠지만,
임금을 만나고자 하는 그들의 갈망을
앗아갈 순 없었습니다.
유다의 임금이라면 마땅히 궁전에서
탄생하셨으리라 믿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2절)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달리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은 임금의 탄생을 몰랐습니다.
오히려 박사들의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성경 말씀 속에서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헤로데는 그 아기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경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 시민들도 헤로데 임금처럼
그저 깜짝 놀라기만 할 뿐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나 경배드린 사람은
밤에도 양들을 돌보던 베들레헴의 목자들과
이방인인 동박의 박사들뿐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어야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시간적 여유가 많다고,
금전적 여유가 많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분도 아닙니다.
해박한 신학지식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겠다는 그 갈망,
그리고 움직이는 용기가 필요할 따름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작은 산골 마을 ‘베들레헴’을 향해 길을 나섭니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춥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했습니다.
오랜 여정을 마치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세 동방박사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그들은 출발하며 무엇을 기대했을까요?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새 왕의 탄생을 그들은 정말
새로 태어난 아기를 생각했을까요?
게다가 왕궁이 아니라 산골의 작은 마을
마구간 구유를 상상이나 했을까요?
하느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들은 가난의 모습, 겸손하고 연약한 아기의 모습에서
위대한 임금님, 어둠을 비추는 빛이신 주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겸손한 모습으로 진리를 볼 수 있는 혜안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별에게 속았구나,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 하고
후회하며 돌아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은 무릎을 꿇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합니다.
자신들의 사랑의 황금을, 경외심의 유향을,
고통의 몰약을 보이지 않되
보이는 하느님의 얼굴 앞에 봉헌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오랫동안 별을 보며
유다의 임금을 곧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느님을 찾는 동안
그분은 이미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애타게 찾고
하느님께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간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으시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까지요.
동방박사들은 별을 놓치지 않으려고,
길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을 겁니다.
캄캄한 어둠 가운데서 작은 빛을 바라보며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느님을 만나고자 한 그 갈망이 컸습니다.
갈망과 별은 연관이 있습니다.
‘갈망하다, 고대하다’를 나타내는 라틴어 desiderium은
별을 뜻하는 sidera와 연관이 있습니다.
라틴어로 갈망은 ‘별을 땅으로 가져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의 갈망은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아기를 만났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꿈에 지시를 받고
다른 길을 택해 자기 고장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 이후,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눈을 뜨게 되었을 때,
이전의 삶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었는데,” 달라질 수밖에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결코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똑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동박박사들처럼 하느님을 만나러 갑시다!
주님께 경배드리러 갑시다!
그러려면 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의 삶이 어둔밤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대낮처럼 저 멀리까지 훤히 내다보이면 좋으련만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지 않습니까?
‘이 길이 맞는 걸까? 이렇게 살면 되는 것일까?’
좌충우돌, 유혹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어디에 부딪혀 다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밤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어둔밤이 되어야 조용한 가운데 잠을 자며 쉴 수 있지 않습니까?
수많은 성인들도 어둔밤을 경험했습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여러 차례 밤의 꿈을 통해 말씀을 건네십니다.
동방박사들에게도 그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때도 밤입니다.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때도, 부활하신 때도 밤입니다.
캄캄해져야만 비로소 보이는 게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매일이 훤한 대낮 같다면,
하느님을 갈구하겠습니까?
어둔밤이어야 별(sidera)을 볼 수 있고,
갈망(desiderium)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을 향한 길을 찾아야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반대입니다.
하느님을 갈망하며 하느님을 향하는 한 걸음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믿지만,
사실은 하느님이 우리를 향해
천 걸음 하시기에 하느님과 우리가 만납니다.
밤이 가장 어두운 바로 그때
별은 가장 환하게 빛납니다.
밤이 아무리 캄캄하고 어둡다해도
밤하늘에 수많은 별은 빛을 냅니다.
마르코신부
25-01-05 14:04
옛날 페르시아에는 별의 움직임으로 시대의 흐름을 읽는 점성술가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페르시아어로 ‘마구쉬’인데, 그리스어 ‘마고스’를 거쳐 라틴어 ‘마구스’(단수 magus, 복수 magi)가 됩니다. 이후 영어 ‘매직’(magic), 곧 ‘마법’이라는 단어로도 발전합니다.
‘마구스’는 현자, 학자, 예언자라는 의미도 내포합니다. 라틴어 ‘마지’(magi)를 성경에서는 ‘박사들’로 번역한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몇 명인지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세 명으로 추산합니다. 흔히 동방박사들을 가리켜 ‘삼왕’이라고 부릅니다. 예전엔 주님공현대축일을 세 명의 왕이 주님께 와서 경배드린다는 의미에서 ‘삼왕래조’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이사야서 60장과 시편 72장의 말씀의 영향을 받아 동방의 박사들을 ‘임금’으로 불렀습니다. 오늘날 동방박사들은 성인들로 추앙되는 세 임금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전승에 따라 그들의 이름은 가스파르, 멜키오르, 발타사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