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주교 대구대교구 인동성당 :::

작은 본당 사목 이야기(서영민 알렉산델 신부)(사목정보 4월호)
*서영민 알렉산델 신부님은 대구대교구 사제이다. 서영민 신부는 2014년 4월 2일 오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 하느님 품에 안겼다. 이 글은 故 서영민 신부가 '사목정보' 2014년 4월호에 기고한 글로써, 세상에 남긴 마지막 공식적인 글일 것이다. 故 서영민 신부의 영원한 안식과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며 이 글을 본 카페에 옮겨 싣는다(카페지기 白).

작은 본당 사목 이야기

"가장 가난한 사제, 가장 겸손한 사제가 되게 해주소서."

서 영 민

서품 9년째, 해평 본당 주임으로 발령받았을 때 저는 하늘을 날 것처럼 기뻤습니다. 그동안 너무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임 신부 발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은 과연 첫 서품 때의 기쁨과도 같았습니다. 이제 드디어 내 본당, 내 신자들을 가지게 되는구나! 며칠 밤을 설치며 부임 날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컸습니다. 과연 본당 신부로 잘 살 수 있을까, 본당 운영은 잘 해낼 수 있을까... 등등. 막상 본당 주임이 된다니 이런저런 걱정들이 앞섰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발령받은 해평 본당은 저희 교구에서 가장 작은 본당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막상 부임해 보니 본당은 정말 작았습니다.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분들이 80여 명 정도였고, 신자 평균 연령은 65세 이상, 게다가 대부분 농사를 짓는 가난한 농부들이었습니다. 워낙 열악한 재정이라 식복사조차 쓸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결국 밥 세 끼조차 저 스스로 다 해먹어야 했고, 사제관 청소에 성당 청소, 빨래, 장보기, 텃밭 일구기, 잔디밭 관리, 시설물 관리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제가 직접 다 해야 했습니다. 여기에다 기도와 묵상, 강론 준비, 그리고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본당의 여러 가지 일들까지... 남들은 '그 작은 본당에서 뭐 그리 할게 많노?'할지 모르지만 저로서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그렇게 바쁘게 살았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이런 삶 자체가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신자들을 위해 나 자신이 끊임없이 희생하고 봉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러했고, 그런 저를 그때마다 걱정하고 염려해 주는 신자들의 사랑이 더욱 그러했습니다. 비록 몸은 힘들고 고달팠지만 '아, 이런 것이 정말 본당 신부의 삶이구나' 싶어 마냥 행복하고 기뻤습니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고,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이 어느 순간부터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보당 신부는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신자들이 조금씩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나를 신부로 생각하기는 하는 걸까? 그저 성당을 관리하는 관리인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등등 별의별 생각들이 다 들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내 첫 본당 생활을 이런 곳에서 시작하게 했을까 하는 생각에 마침내 주교님까지도 원망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제 일상들이, 그것도 나아지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제 삶이 마치 거대한 다람쥐 쳇바퀴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의미 없고 소모적인 삶으로는 정말이지 더 이상 살 수가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강론을 준비하면서 우연히 일기장을 펼쳐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엔 처음 서품을 받던 날 바쳤던 저의 첫 기도가 적혀 있었습니다. "가장 가난한 사제, 가장 겸손한 사제가 되게 해주십시오."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의미 없고 원망스럽기만 했던 제 삶들이, 제가 그토록 기도하며 갈망했던 첫 사제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제 첫 기도를, 그것도 가장 온전하게 들어주고 계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동시에 참으로 죄송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너무도 오랫동안 저의 이 첫 기도를 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저 자신도 잊고 살았던 제 첫 기도를 온전히 들어주고 계셨습니다.
비로소 저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본당 형편이 그동안 제 삶을 얼마나 자유롭게 해주었는지, 또 이렇게 섬기고 봉사하는 삶이 진실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참 겸손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이 깨달음 이후 저는 다시금 기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곳 해평 본당에서의 삶도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본당 형편은 여전히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제 일상들도 여전히 똑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훨씬 더 기쁘고 행복합니다. 신자분들과도 훨씬 더 친해졌고, 훨씬 더 큰 하느님의 사랑을 그때마다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 삶이 지금은 얼마나 감사하고 또 행복한지 모릅니다. 이런 작은 시골 본당으로 저를 보내주신, 그래서 제 첫 기도를 다시금 일깨워주신 하느님이 얼마나 감사하고 또 감사한지 모릅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이 글을 마치며 다시 한 번 상상해 봅니다. '만일 주임 신부로서 제 첫 본당이 이런 작은 본당이 아니라 대도시의 큰 본당이었다면, 과연 나는 지금처럼 이렇게 기뻐하고 행복해하고 있을까..." 그랬다면 저는 지금도 여전히 제 첫 마음을 잊은 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저의 첫 사제상을 찾게 해준 가난한 시골 본당인 해평 본당... 지금 저는 너무도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저는 기도합니다. "좀 더 가난하고, 좀 더 겸손한 사제가 되게 해주소서